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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비평

'임신'의 숭고함에 대한 소고

by Cou꾸 2026. 6. 30.

  우리는 어째서 '임신'에 대해서 그토록 무조건적인 경외를, 또 어느 한 쪽에서는 그토록 무자비하게 '임신'을 평가절하 하려고 하는 것일까, 물론 이것은 숭고를 생각해본다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인간은 도통 가만히 두어서는 어떠한 사유도 하지 않는 동물이다. 인간은 언제나 강제에 의해서 사유하며, 그렇기에 '임신'이라는 것은 모든 방면에서 우리에게 무언가를 강제하며 그러한 까닭에 한 쪽에서의 무조건적인 경외와, 또 다른 쪽에서의 무자비한 평가절하가 발생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이 거대한 두가지의 입장은 모두 그르다. 이 입장들은 숭고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긍정'에 대해서 조금도 사유하지 못한 결과인데, '임신'에 대해서 그토록 무조건적인 경외를 보이는 것은 대체로 남성들이다. 당연히 우리는 우리가 결코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숭고를 느끼고, 아마 로마의 베스타 사제들 역시 그러한 이유로 추존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외는 '임신'을 하나의 억압적인 기표로서 향유할 뿐이고, 그 향유야말로 이러한 경외가 지속되도록 만든다. 그들은 누군가의 "존나 아프니까!" 라는 말을 단지 무책임한 페미니스트 내지는 이단자의 엄살로 치부한다. 심지어 여성들이, 임신을 경험한 여성들이 이러한 목소리를 내는 여성을 두고 공격하는 사례도 있다. 이것은 자발적 예속의 표본이며, 사유의 결여인데, 이러한 초월적 기표에 대한 동조야말로 결코 하나의 기표로서 환원될 수 없는 제각각의 삶들을 단지 덧없는 것으로 격하하고, 진정으로 중요한 것을 잊게 만든다. 만약 '임신' 자체가 그토록 숭고한 것이라면, 우리의 부모, 그리고 당신들의 부모는 단지 우리를 낳았다는 이유만으로 신성을 획득하는 것인가?

부모가 자식을 낳은 이후로 그 자식을 학대했던, 사랑을 담아 키웠던 우리는 그것과는 상관없이 부모에게는 반드시 최소한의 신성을 남겨두어야만 할 것이다. 심지어 입양을 하는 부모들은 마땅히 자식을 출산하여 기르는 부모와 달리 평가되야 할 것이다. '임신'이 더 신성한가, '입양'이 더 신성한가? 칸트주의에서는 아마도 입양을 하는 부모를 이성적 주체라며 치켜 세울테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고, 실제로 그들의 편견들이 이러한 의문에 대한 확실한 답을 주고 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미루어 본다면 둘 중 하나는 더 신성한 것으로, 아니면 동등하게 평가되어야 할 것인데 이는 둘 다 부당하다. 

하지만 그리 생각하는 이들이 이것에 대해서는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자연의 잔혹한 결벽성이며, 이것을 거부하는 자들이 반드시 있다는 사실 역시 그러하다. 그들은 한마디로 자신이 특정 기표 앞에서 어떠한 분별도 할 수 없는 황홀경에 젖어있다는 것을, 거기서 결코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도 시인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임신'을 초월적 기표로 두는 것은 부당하다. 우리는 '임신' 자체를 그렇게 대우하기 보다도 단지 더 중요한 것을 위해서 아직까지는 결코 피할 수 없는, 그것도 심지어 부당하게 여성이 죽음이나 장애를 감수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나쁨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이 나쁨 안에서, 진정 사랑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 속에서 나의 연인이 슬픔에 빠지지 않도록, 피할 수 없는 슬픔을 견딜 수 있도록 도울 수밖에 없는 것이지 그 따위 저열한 숭배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다.

 

  동시에 임신을 그토록 무자비하게 평가절하하는 자들의 기획은 그 자체로 반동적이다. 그들은 물론 여성들의 고통에 대해서 공감할 최소한의 능력은 갖추고 있다. 그러나 역겨운 이데올로기는 그 능력을 이데올로기에 복무하기 위한 능력으로 환원시키고야 만다.

그들이 임신을 무자비하게 평가절하할 때, 임신의 신성을 격하하는 것은 맞는 것이다. 그 어떠한 고귀한 것도 달리 존재해서는, 그리고 달리 위치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 임신의 신성을 격하하는 이유는 결국 비혼과 비출산으로 귀결된다. 이것은, 기쁨을 위하여 필연적으로 자신에게 찾아올 수 밖에 없는 슬픔을 감내하고 그것을 견뎌내려 하는 여성의 결심, 그리고 이 진정으로 고귀한 일 자체를 평가절하하고 여성을 단지 다른 차원에서 수동적 존재로 포섭하려는 점에서 '임신'을 초월적 기표로 향유하려고 하는 자들의 역겨운 냄새가 난다. 이 반동적인 자들이 '임신'을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로 위치하는 이유는 마찬가지로 그저 예속을 위한 것에 불과하다.

아마도 오히려 그들은 '임신'이 더욱 초월적인 기표로서 거듭나기를 빌고 있을 수도 있다. 이 경우에는 그들의 진정성 자체가 의심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단지 자신들의 반동적 기획을 실현하기 위한 힘만을 의지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임신'이 보다 초월적인 기표로 될 수록, 그것을 끌어내리려고 하는 그들의 힘은 그만큼 더 강해진다. 그리고 앞서도 말했듯이 이 과정에서 '임신' 이후의 제각각의 삶은 덧없는 것이 된다. 심지어 이 쪽의 입장에서는 덧없는 것을 넘어 '무'에 불과하다. 그들은 '임신' 이후가 없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생각 속에서, 이 문제들에 대한 대안이 될법한 것을 파이어스톤에게 찾았으나 지금 생각해보면 파이어스톤 역시 어느정도 반동적이다. 파이어스톤이 임신을 야만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그야 그것은 존나 아프니까!"

그렇기에 파이어스톤의 공격은 마찬가지로 내가 앞서 말한 초월적 기표로써 휘둘려지는 '임신' 그 자체를 향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공격의 방향은 정당하고, 공정하다. 파이어스톤은 '임신'과 마찬가지로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 이 또다른 초월적 기표역시 동시에 공격하고 있으며 그것은 이윽고 남성과 여성 모두를 예속의 상태로 두고 지배하는 '사회구조'를 향하고 있다.

하지만 남성에 경우는 나중에 더 논의하도록 하고, 남성이던, 여성이던 도대체 그들이 '임신'을 왜 그토록 여전히, 숭고한 것으로 보는지에 대해서 먼저 말하자. 오랜 시간 속에서 역사의 발전을 통해서 우리는 감히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일을 능히 할 수 있게 되었다. 

예컨대 우공의 노고는 정말로 어리석은 것이 되어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우공의 노고가 우리에게 여전히 숭고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공의 노고가 동시에 숭고하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마찬가지로 기꺼이 그가 필연적으로 맞닥뜨릴 수 밖에 없는 고통을 견뎌냈다는 점에 있다. 우공이 어째서 우공인가? 만약 현옹이었다면, 우공이더라도 능히 산을 옮길 여력이 있었다면 그는 결코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도 않았을테고, 사람들은 그가 산을 옮기는 행위를 더 이상 숭고하게도 보지 않았을 것이다.

임신으로 돌아가서, 만약 임신의 과정에서 여성의 모든 노고와 고통이 경감되고, 산통 또한 없으며 산후 겪게 될 부작용 또한 없도록 만들어주는 혁신적인 기술이 개발된다면, 도대체 임신은 무엇인가? 그것이 상용화되어 모든 여성들이 그것을 이용하는 와중에, 그것을 거부하고 기꺼이 자연의 섭리라고 여겨진 고통을 받아들이는 여성을 이제는 경외하고야 말 것인가?

이런 기술도 개발되지 않은 상태에서 남성이던 여성이던 도대체 '임신'의 어떤 부분에서 경외를 느끼는 것인가?

내가 말했듯이 필연적으로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려는 여성들의 모습에서? 그렇게 말하는 순간 그들은 사디스트가 될 것이다. 여성들의 이 마조히즘에서, 진정으로 고귀한 것은 말했듯이 이 고통을 견뎌내려는 결단에 있지, '임신'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이후의 삶은 저러한 숭고 때문에, 여성들의 불만과 고통을 엄살, 볼멘 소리로 치부하고야 만다. 하지만 그 이후의 삶에서 다가오는 모든 고통과 슬픔 역시 필연적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그것을 기꺼이 감내하는 것은 고귀하다. 

그러나 파이어스톤은 이것이 그렇게 고귀한 것처럼 보지는 않은 것 같다. 결국 그의 급진적 귀결은, '임신' 자체를 제거하고 뒤이어 '가족'까지 제거하자는 것인데, 그리 했을 때가 어떻게 진정으로 해방인지에 대해서는 어떠한 설명도 하지 않고 할 수도 없다.

그 어떠한 학설이든, 해방에 대해서, 해방 그 자체를 목적으로 비토하는 것은 지적으로는 어느 정도 사기고, 파괴적이다. 그것은 파괴가 수단이 될지, 목적이 될지에 대해서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결론적으로 나는 지금 이러한 상황에서 대안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도르노의 모델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토록 전망이 절망적인 것은, 아마도 무엇하나 진정으로 고통받는 이를 도울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는 이루어지지 않을 이상을 꿈꾸며,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리고 생생한 현실은 각각의 구체적 삶에 있지, 고작 부산물일 기표 따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모든 기표들의 보다 정렬되고 세련된 놀음인 철학은, 그렇기에 이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결코 억압받지 않도록, 속박이 없을 수 있도록, 그를 통해 진정 자유인으로

거듭나도록...

모든 철학자들의 글이 이러한 투쟁의 역사고,

나는 하나의 기표를 욕하면서도 아이러니하게도 철학자들의 글을 투쟁의 역사로 환원하고 있다.

하지만 이 나의 나약함이, 게으름이 바로 나의 작품을 만들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내 전 생애가 하나의 천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