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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비평

아도르노에 대한 소고-부정변증법의 방법, 현실성과 실천성

by Cou꾸 2026. 6. 17.

 헤겔의 변증법에 대해 논하기 위해서 먼저 스피노자를 논하지 않을 수가 없다.

헤겔의 변증법은 외관상 스피노자의 그것들과 일치한다.-1. 존재론에서 인식론으로의 이행 2. 그것으로부터 도출되지 않을 수가 없는 존재론과 인식론의 일치-헤겔은 이것을 대논리학에서 자인하는데[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이다.]

이러한 외관상의 일치로부터, 이러한 외관을 획득하기 위한 방법을 추적해본다면, 헤겔이 단지 스피노자의 학설을 반만 취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 남은 반을 은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헤겔의 존재론은 출발점에서부터 타당하지 않다. 

스피노자의 신존재증명은 어떤 가상적이고 가설적인 사고실험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이고 경험적인 것, 그리고 존재론적인 확실성을 아직 담보하지 않은 것들로부터 시작하여 그것들의 원인을 추적하고, 그로부터 도출되어야만 하는 제1원인을 발견함으로써 비로소 적실한 관념과 혼동되고 적실하지 않은 관념을 규정지을 수 있게 된다. 헤겔은 이 점을 소홀히 했다.

그는 개별적인 것, 즉 내용을 정신이라는 형식 속에 포섭한 것으로 모자라 도달해야만 할 절대정신으로의 고양을 강제한다. 다시 말해, 이러한 식의 변증법은 그것이 권리적으로던 실제적으로던 어떤 목적을 상정하는 한, 내용들을 단지 덧없는 것으로 만들고, 그렇기에 내용들이 항구적이어야 할 (실질적으로) 형식 밖으로 돌출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며, 나아가 윤리적 차원에서 정과 반에 대한 반성적 통합이 없는 한 어떠한 인륜성도 출현할 수 없다는 것, 그렇기에 도리어 그 인륜성 때문에 "이러한 일이 다시는 발생해서는 안된다."는 명령이 제기될 수 없다는 점에서 헤겔의 변증법은 그때서야 비로소, 사변적인 긍정 변증법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스피노자의 제1원인은 그 자체로 목적이 없고, 무한적이기에 어떤 피안을 말할 수 없다.)

 

 아도르노는 이러한 이유로 변증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쇄신을 시도한다.

1. 객체의 옹호, 주체의 평가절하(그러나 실질적으로는 객체와 주체의 존재론적 지위에 대한 평등)

2. 헤겔이 은폐한 스피노자의 학설의 남은 반-경험의 지위, 나아가 '몸'의 지위의 회복

3.목적론의 폐기

->부정변증법

아도르노가 자신의 부정변증법을 설명하는 대목은 언제나 사회와 연관되어 있다. 그도 책에서 밝힌 바, 헤겔의 이 사변적 긍정성이 사물로부터 생겨나지 않고 방법으로부터 생겨나게 되며, 그렇게 생겨난 것은 역겨운 것이 되어버린다. 말하자면 내감이라는 것이 비규정적이고 사실 내감이라고 불리는, 내감이 가리키는 어떤 것이 우리에게 직접적이기도 하다.

이것이 사물 그 자체에서 나오는 긍정성이 될 것이다. 그것이 보다 내용적 차원에서는 우리로 하여금 긍정, 부정 하게끔 만들지만 결국엔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러이러 하도록 강제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것의 강제성이, 그리고 직접성이 차이를 생산하고, 저러한 사변과 추상의 억압적 언어에 대항하기 쉽지 않도록 만든다. 허나 분명한 것은,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직접적을 느끼게 하는 어떤 것은, 사변과 추상과 달리 너무나 단순하여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몸의 직관을 억압하고 그것을 설명하려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의 예속을 구원인양 찬양하게끔 만들었다.

실제의 선과 악 모두 지루하고 따분하며, 오로지 좋음과 나쁨에만 기쁨과 생명이 넘쳐 흐른다.

 

 그렇기에 부정변증법은 먼저 사변과 추상의 억압적 인식론에 대응하여, 인식의 새로운 면을 발명하라고 종용한다. 그것은 미메시스인데, 아리스토텔레스의 미메시스가 단지 무언가의 본질을 재현하는 것이라면, 아도르노의 미메시스는 내가 바로 위에서 설명한, 저러한 것으로서의 미메시스이다. 그리고 이 경우에, 우리는 어떠한 교설도 따르지 않고 단지 몸이 강제하는 대로, 희상자들의 묘소에 절로 무릎 꿇게 되며, 그때서야 진정 대화 가능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어떤 식으로던)

그렇게 우리는, 몸으로부터 "이 참상을 재현하지 않도록, 숙고하라."는 명령을 비로소 수행할 수 있게 되고, 그럴 때 사회는 운동을 참칭하면서 사실 가짜-미래로 가기를 이행하고 있는 추상과 사변의 억압을 인식하고 객체들의 혁명, 다시 말해 그 자신들에게는 형식처럼 느껴졌던 사회를 변혁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즉, 나는 이러한 시각에서 아도르노의 이론의 현실성을 2가지 측면으로 평가할 수 있겠다.

첫째로 그가 생생한 마르크스주의의 오랜 교시[리얼리스트이되, 이상을 꿈꿔라.]를 포기하지 않고 그것도 아주 어둡고 고통스러운 형태로 체현했다는 점이다. 물론 그의 부정변증법은 비판들로만 가득 차 있지만, 저러한 냉소들 속에서 내가 위에서 말한대로의 어떤 전망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저러한 전망도 희망적인 것이라 볼 수 없지만, 그것을 상상할 수 있게끔 한다. 둘째로 추상적 사변과 공상에 사로잡혀 억압을 자행하는 자들[오늘 날에도 유효하다.]의 요설이 얼마나 추악하고 공허한지를 끝없는 부정과 비판을 통해 고발한다. 물론 이 부분이 아도르노가 현실성이, 실천성이 없다고 하는 가장 주된 근거가 되겠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러한 비판은 마치 세상에 철학자가 아도르노 단 한명 뿐이라고 생각하기에 제기되는 비판이고, 무엇보다도 그의 시비조차 내적으로 극복할 수 없는 이론, 다시 말해 사이비 이론을 가려낸다는 잣대에서 아도르노의 이론은 충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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