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밝혀두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씀.
나는 지금 철학을 지금 굉장히 보수적으로 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러니까 으레 대중들이 가지는 모든 문제들에 대해서, 나는 별다른 관심이 없고 그것이 철학적 탐구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대중들이 원하는 어떤 것을 가져다 주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나의 방향을 명시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내가 철학함에 있어서 지켜야만 할 원칙들을 말이다.
1. 사유에 대하여
나는 수많은 이들이 사유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이들은 단지 혼동된 관념들 속에서, 그 전체의 필연성 중 아주 일부분 정도 되는 파편마저 간과하고 있는 것 같다. 유수의 문고 인문학 코너에서 어떤 책들이 많이 팔리는 지를 유심히 보라. 나는 여기서 도무지 사유라는 것을 찾아볼 수 없다.
이들은 사유를 신성시하면서도 그것을 자신들이 수행할 수 있는 것으로 격하시키려는, 말하자면 과실만을 취하겠다는 괘씸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데, 어떤 학문에 대한 이러한 비존중은 여타 다른 학문들-과학, 수학, 언어학 등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서, 이것이야말로 오늘날의 위기이다.
이들은 우리가 사유하지 않았을 때 어떤 참사가 발생하는 지를 알면서, 본인이 사유를 하고 있는가 하고 있지 않는가는 묻지 않는다. 아마도 대개의 경우에, 사유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재인과 사유는 엄밀히 다른 개념이다.
그리고 내가 어떤 생각에 대해서 엄격한 논리적 잣대를 가져다 대면, 누군가는 그것이 사유를 경직시키는 억압적 행위라고 말한다. (여기서도 그들이 철학을 비학문으로서 대하는 태도가 여실히 드러난다.) 하지만 그런 건 사유가 아니다.[아마 네가 누군데 사유가 아니냐 맞느냐를 규정하냐 말할테지만, 나에게는 그 정도 수준의 부적합한 관념들을 가려내고 그것이 사유가 아닌지 맞는지를 검토할 능력은 충분히 가지고 있다.] 나는 오히려 그 생각을 논리적으로 검토하여 그것을 사유로서 재구성하는 것, 그리고 그로부터 출발해야 된다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인데도 이런 의도를 모르고 있다.
그렇기에 나는 이제 누군가가 나와 철학적 대화를 하고 싶다고 청한다면, 응하지 않으련다. 애초에 나 자신이 본래부터 누군가와 철학적 대화를 하는 것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누군가 내가 엄격한 논리적 잣대를 가져다 대는 것에 호의적이라고 할지라도, 그러한 검토의 과정은 그 자체로 너무나 피로하고 사실은 내가 이미 아는 것을 다시 확인하는 것, 다시 말해 아무것도 사유하지 않는 것과 다름 없으므로, 만약 내가 이런 수준의 검토와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고, 그들 스스로 배우려고, 그리고 생각하려는 의지가 있는 사람이나 또는 나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학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만 철학적 대화를 하는 편이 좋겠다.
2. 소수적 방법
철학의 대중화는 명맥을 이어가기 위해서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철학이 가지는 혁명적 힘이지, 대중화가 우선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철학은 소수적일 때, 역설적으로 가장 폭발적일 수 있다.
그렇기에 대중화는 내가 봤을 때 그렇게 좋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철학을 표준화하려는 것이고, 대중의 이해를 표준화하려는 것과 같다. 고귀한 것은 고귀한만큼 어렵고, 고귀한 것은 인간의 쾌고 여부 따위는 묻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것이 아무도 침울하지 않게하고, 언짢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마도 고귀한 것이 아닐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니체의 귀족주의는 소수의 정치학으로 재구성된다. 니체 본연의 귀족주의를 통해서도 이러한 재구성은 충분히 가능하다. 만약 귀족주의가 이미 확립된 계급에 의거한 귀족주의였다면, 그것은 니체 본인이 그토록 혐오해 마지 않던 노예도덕이 될 것이다. 오히려 재구성된 소수의 정치학은 그러한 계급과 거리를 두며, 그것이 소수의 미분적인 움직임을 가로 막으려 든다면, 제거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거리의 파토스는 필연적으로 요청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사유의 일관성을 위해서, 소수가 단지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명시할 것이다. 소수 역시 충분히 반동적일 수 있다. 예컨대, 오늘 날의 PC주의의 억압으로부터 돌출된 어떤 소수는, 이미 그 억압으로부터 돌출되었다는 점에서 소수로서 정당성을 얻는다. 그러나 소수가 단지 좋은 것만이 아니라는 것은 사유의 일관성 속에서 요청되어야만 하는거지, 사유하는 데 있어 중요한 부분은 아니다. 물론 사유의 일관성이 없다면 그것은 이미 사유가 아니고, 그렇기에 출발할 수 없다. 오히려 우리는 어떤 소수가 그려내는 선들에 지목을 해야한다. 선을 그리는 행위, 그것은 불필요한 다른 모든 것들을 제거하고 오로지 선만을 남기는 것, 그러나 그것이 더 이상 선을 그릴 수 없도록 그려지는 움직임을 보인다면, 그것은 그때부터는 소수가 아니다. 우리는 단지 어떤 소수가 그 자체로 좋고 나쁘다기 보다 그것이 어떤 효과를 생산해내는지를 주목해야하고, 그리고 계속 생산하고 있는지를 주목해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오늘 날의 PC주의의 억압으로부터 돌출된 어떤 소수의 출현은, PC주의가 얼마나 억압적으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보여줄 뿐, 그들의 움직임 자체로서는 그 어떠한 생명력도 보여주지 못한, 그러므로 반동적이다고 간주될 수 있는 것이다.
즉 나에게 주어진 어떤 임무는 어떤 기계를 작동함에 있어 끊임없는 보수, 그리고 그렇게 해야만 한다면 그 기계를 전혀 다른 것으로 개조하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인 '차이 그 자체'를 위해서 수행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다시말해 지금의 내 방법은 이 원리에 의해서 얼마든지 폐기되고 대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만, 사유의 일관성은 역설적으로 유지된다.
3. 철학의 방법
어떤 학설을 마주칠 때, 그것에 대해서 이미 확립된 나의 주장, 논리를 제1원리로 두고서 그것을 대한다면, 그러한 식의 마주침은 마치 내가 처음 만나는 사람을 만나기 전에,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상해를 입히거나 죽이기 위해서 흉기를 챙기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그런 식의 접근은 당연히 그 학설에 대해서 그것을 학설 자체로서, 그리고 그것에 대한 이해를 포기하고 결정적으로는 어떤 사유의 생산도 하지 않겠다는 고백과 다름없다. 이러한 식의 논의는 영미철학계에 어떤 탁월한 철학자의 내부고발(콰인은 아니다) 방식으로 이미 이루어져 있는데, 나 역시 그 탁월한 철학자의 고발에 깊이 동감하고, 개탄을 느끼며 앞으로의 내 철학의 방법에 있어서도 이를 언제나 명심하고 오로지 내가 곧 만나게 될 어떤 학설에 대한 설렘과 호기심만을 남기고 만날 준비를 하련다.
이것은 철학의 방법, 그것의 윤리적인 차원에서 가장 먼저 선취되어야 할 부분이며 이러한 원칙이 무너지면 다른 모든 것들이 무너진다는 것을 나는 명시한다.
4. 문헌학적 방법에 대한 옹호
물론 레퍼런스를 충실히 반영하라는 것, 그리고 그것을 충실히 반영하기 위한 배경지식을 쌓으라는 것은 뿌리로서 나와 직접적으로 관계맺고 있는 들뢰즈가 인터뷰에서 충분히 밝힌 바이다. 그런데 지금의 철학에서는 종종 그것이 무시되는 경향이 있는데, 나는 어째서 그러한 경향이 존재할 수 있는지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오히려 그것은 지적인 결백을 어떻게든 사수하기 위해서, 마치 테오도시우스 장벽을 국경 전체에 세우고 어떠한 출입도 거부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하지만 이로부터 귀결될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문헌학적 방법 자체에 대한 괄시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엄밀한 문헌학적 방법을 기반으로 자신의 학설을 방어하는 것에 대해 그것이 단지 철학에 대한 문자적 독해라고 비하하곤 하는데, 물론 그럴 수 있다. 심지어 오해가 사유의 생산성을 증대 시킨다는 것 또한 타당한 말이다. 그러나 바꿔 말하자면, 그런 오해는 사실 어떤 우연을 기대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오히려 철저한 문헌학적 방법은 그러한 오해를 더 많이 할 수 있도록- 다시 말해 그러한 장을 제공할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오해의 방법 역시 어떤 철학자가 발견해내지 못한, 그 철학자도 모르는 그 철학자의 학설을 밝혀내는 것이 되어야 하는데, 이것에는 분명히 그것이 그 철학자도 모르는 그 철학자의 학설이라고 주장할만한 설득력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설득력을 판별하는 기준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다시 문헌학적 방법으로 돌아가야만 할 것이다.
아얘 말하지 않은 것을 말했다고 하는 것은 사기다. 오히려 그 철학자도 모르는 그 철학자의 학설을 발견하는 것은, 어떤 심연을 탐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제대로 알지도,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모르지도 않는, 앎과 무지의 경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비판적 작업이다.